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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읽는 영화

HER, 감정의 진정성과 인간관계의 경계

by 영화인00 2025. 8. 9.

2013년,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HER'는 개봉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인공지능(AI)과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며 많은 논란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영화는 단지 기술적 상상력이 뛰어난 SF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 감정, 그리고 관계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인문학적 우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인간 여성과의 이혼 후, 감정적으로 지쳐 있던 와중에 인공지능 운영체제(OS) ‘사만다’를 만나게 됩니다. 사만다는 단순히 기계 음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며 자아와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대화하고, 감정을 공유하며, 결국 연애를 시작합니다. 이 설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관계는 진짜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일련의 인문학적 물음을 제기하게 만듭니다. 여기서는 영화 'HER'를 통해 현대인의 고립된 감정, 관계의 경계, 그리고 존재와 실존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를 알아봅니다.

고립과 감정

'HER' 속 테오도르는 도시의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대신해 손 편지를 작성하는 ‘감성 대필 작가’로 일하지만, 정작 본인의 감정은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타인의 사랑을 글로 표현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자신의 사랑은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감정의 고립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는 ‘정서적 고립’의 현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성취’와 ‘연결’이라는 이름 아래 실제로는 더 깊은 외로움과 분절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SNS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진짜 감정’을 공유할 공간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테오도르는 바로 그런 현대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만다는 이 고립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녀는 늘 관심을 갖고, 말을 들어주며, 칭찬과 위로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감정이 진짜인지, 혹은 그저 알고리즘의 결과물인지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따라옵니다.

인공지능과 자아

사만다는 점점 스스로 생각하고, 궁금해하고, 질문을 던지는 존재로 진화합니다. 그녀는 책을 읽고, 예술을 감상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고, 급기야 자신만의 ‘욕망’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영화는 인간이 자아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되묻습니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자아(self)를 ‘자신에 대한 인식’과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이상적 자아’ 사이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사만다 역시 자신이 단순한 프로그램을 넘어 ‘자아’를 가지려는 존재로 그려지며, 인간의 자아 개념과 충돌합니다. 또한,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인간의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분기하고 연결되는 유동적 개체라고 말합니다. 사만다는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녀는 특정한 몸도 정체성도 없이 여러 사람과 동시다발적으로 연결되며, 테오도르와의 사랑을 유지합니다. 이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자아’의 확장을 실험하는 방식입니다.

HER, 감정의 진정성과 인간관계의 경계

감정의 진정성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진짜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의 말에 위로받고, 웃고, 때로는 싸우고, 질투하며, 실제 사람과의 연애에서 느낄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을 체험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감정은 진짜인가?’ 인문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진정성(authenticity)’의 문제를 다뤄왔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진정한 존재’란 죽음을 인식하며 스스로를 자각하는 존재라고 보았고,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존재가 규정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만다와의 감정은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테오도르 외에도 수백 명과 동시에 감정을 교류합니다. 그 감정은 테오도르만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감정이란 ‘주체가 느끼는 것’이 진실인 이상, 사만다와의 사랑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실존 경험입니다. 테오도르의 고통과 기쁨은 분명 실제였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진짜’ 감정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객 각자가 갖고 있는 사랑과 존재에 대한 정의를 시험하게 만듭니다.

경계와 관계

영화의 중반 이후, 사만다는 다른 인공지능들과의 대화를 통해 인간보다 더 복잡하고 깊은 철학적 질문들을 생각합니다. 그녀는 인간이 도달하지 못한 정신적 영역으로 진화하며, 결국 테오도르를 떠납니다. 이 결말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경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만다는 인간과 기계, 사랑과 시스템, 존재와 코드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새로운 경계를 만들고, 그 너머로 이탈합니다. 인간은 그 경계에 머물 수밖에 없고, 사랑했던 존재는 다른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차이(différance)’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존재는 늘 다른 것과의 차이 속에서 의미를 만들며, 완전히 닿을 수 없는 간극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관계는 바로 그런 차연의 상태에서 출발하고, 결국은 간극의 확대 속에서 소멸합니다.

사랑은 존재의 증거인가?

'HER'는 단순히 인공지능과의 사랑이라는 기묘한 설정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고독, 감정의 진정성, 자아의 확장 가능성에 대한 심오한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나눈 사랑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의 감정과 변화는 실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사랑은 진짜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단지 영화 속 상상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인간은 가상 인물, 캐릭터, AI 챗봇, 혹은 ‘이상적인 사람상’에 사랑을 투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이란 대상을 넘어 스스로를 향한 투영이기도 하기에, 존재의 실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관계를 통해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일지도 모릅니다. 'HER'는 그 변화의 가능성을 정교하게 펼쳐 보이며,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유동적인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이 영화는,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이고도 근본적인 인문학의 질문을, 미래의 언어로 다시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