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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읽는 영화

기생충, 계급의 공간과 사회적 위계

by 영화인00 2025. 8. 9.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은 현대 사회의 계급 불평등을 시각적으로, 구조적으로 정밀하게 설계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립을 그리는 사회극이 아닙니다. 인간이 사는 ‘공간’이 곧 계급의 구조와 위계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인문지리학적이고 인문사회학적인 해석이 가능한 고도의 상징성을 가진 영화입니다. 

기생충, 계급의 공간과 사회적 위계

주요 내용

기택 가족이 사는 반지하, 박 사장이 사는 고급 주택, 그리고 지하실. 이 세 공간은 물리적인 높이만큼이나 사회적 위치를 은유합니다. 반지하는 지상의 빛과 연결되어 있으나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빗물의 영향을 그대로 받는 취약한 공간입니다. 반면 박 사장네 집은 경비가 있는 언덕 위의 고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비가 와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공간이 권력이고 계급이라는 점을 시각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영화에서 비가 오는 장면은 이 구조적 위계를 극단적으로 드러냅니다. 박 사장 가족은 캠핑이 취소되자 안락한 거실에서 파티를 열고, 기택 가족은 하수구를 타고 넘쳐나는 오물 속을 기어 내려갑니다. 공간의 차이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생존 조건까지 규정짓는 구조적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냄새와 타자화

이 영화에서 ‘냄새’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강력한 상징입니다. 박 사장은 기택에게서 ‘지하철 냄새’가 난다고 표현합니다. 냄새는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감각 중 가장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요소입니다. 여기서 냄새는 단순한 후각적 요소가 아니라, 계급적 정체성을 감지하는 상징이 됩니다. 냄새는 ‘타자화’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타자화란 자신과 다른 존재를 구분을 짓고, 경계 너머에 두는 인지적, 사회적 과정입니다. 박 사장은 기택을 신뢰하면서도 끝내 그를 가까이 두지 않으며, ‘선은 넘지 말라’는 언급으로 경계를 그어놓습니다. 이는 단지 물리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선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영화의 후반부, 파티장에서 박 사장이 코를 막는 그 짧은 제스처는 모든 감정을 뒤엎는 방아쇠가 됩니다. 냄새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기택은 샤워 해도, 향수를 써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흔적처럼 따라다니는 ‘계급의 낙인’을 떠안고 살아갑니다. 이 상징은 인간의 삶에서 계급이 단지 경제적 지표가 아니라, 신체와 감각, 정체성 그 자체에까지 깊이 침투해 있음을 보여주는 섬세한 인문학적 장치입니다.

모방과 위장

기택 가족은 하나씩 위장 취업을 하며 박 사장네 가족과 가까워집니다. 이 과정은 단지 생존을 위한 술수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박 사장 가족이 가진 ‘교양’, ‘품격’, ‘상류층의 언어’를 그대로 흉내 내며 그 세계에 편입되고자 합니다. 이때 영화는 모방과 위장의 윤리적 경계보다도, 인간이 욕망하는 ‘다른 삶’이 어떻게 구축되는가에 집중합니다. 기정은 미술 치료사로, 기우는 대학생으로 변모하며 ‘말투’, ‘행동’, ‘표현 방식’까지 복제합니다. 그러나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결국 그들이 자라온 삶의 질감, 경험, 인식 구조입니다. 이 과정에서 위장은 완벽하지 않으며, 그들의 진짜 정체는 결국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위장과 침입은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이론과 연결됩니다. 부르디외는 인간의 행위는 '아비투스(habitus)'—즉, 오랜 시간 축적된 신체적·정신적 습관—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기택 가족은 일시적으로는 상류층의 행위를 모방할 수 있으나, 그들의 아비투스는 그 세계에 최종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위장은 성공이 아닌 파국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지하실과 억압된 무의식

박 사장네 집 지하실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은유 공간입니다. 이곳에는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는 또 다른 인물이 존재합니다. 이는 사회 속에서 철저히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계층을 상징합니다. 영화 속의 지하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사회 구조 아래 억눌린 존재, 혹은 인간 정신 속 억압된 무의식의 공간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억압된 무의식은 의식 세계로부터 차단되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되돌아옵니다. 이 영화에서 지하실의 존재는 그렇게 되돌아온 억압의 형상입니다. 그리고 이 억압된 존재와의 충돌은 결코 평화롭게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박 사장의 생일 파티라는 가장 밝고 화려한 순간, 억압된 존재가 지상으로 올라오며 비극이 시작됩니다. 이 지점은 인문학적으로 매우 흥미롭습니다. 인간 사회는 언제나 질서와 제도 위에 억압을 깔고 있습니다. 억압은 그 자체로 통제되지만,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표면화되며, 그것이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충돌과 붕괴가 일어납니다. 영화 '기생충'의 결말은 바로 그 충돌의 은유입니다.

질문과 여운

'기생충'은 영화가 끝난 뒤 더 많은 질문을 남깁니다. 누구는 ‘기택이 왜 박 사장을 죽였는가?’에 집중하고, 누구는 ‘왜 아들은 다시 그 집을 사겠다고 결심하는가?’를 묻습니다. 그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의 본질로 수렴됩니다. 과연 우리는 계급을 벗어날 수 있는가? 혹은 계급은 언제부터 우리를 규정하는가? 영화 속 아들이 부자가 되겠다는 결심은 의지처럼 보이지만, 카메라는 그것을 ‘불가능한 희망’처럼 처리합니다. 꿈이 꿈으로 끝나고 마는 이 씁쓸한 결말은, 계급 이동이 점점 어려워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구조를 비추는 인문학적 질문입니다. 인간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살아가지만, 그 꿈은 결국 공간, 냄새, 언어, 경험 같은 구체적이고 미세한 조건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서, '기생충'은 ‘희망조차 계급적’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